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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을 스님으로... 감히 독립운동가를 품어준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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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1-05 09:38 조회3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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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남짓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달려와 다시 20분 이상 구불구불한 지방도로를 내달린다. 엎어 놓은 밥공기만 한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온다. 산자락마다 채 녹지 않은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하고 조바심이 날 즈음 마곡사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마곡사는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화를 간직한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지만 거대 관광사찰들처럼 번잡하거나 요란스럽지 않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해야 할까. 소박한 질그릇 같은 진중함과 이웃집 같은 편안함이 묻어나는 절이다. 

마곡사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긴 겨울을 지나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신록이 우거지는 마곡의 봄에 홀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춘마곡'이란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마곡사'란 절 이름은 법문을 듣고 경치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우니, 그 모습이 마치 삼이 서 있는 것과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

매표소와 일주문을 지나면 마곡천을 따라 조성된 포장도로와 나무데크길이 마곡사 입구까지 이어진다. 솔숲을 가로지르는 마곡사 가는 길에서는 고찰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푸르른 솔향은 덤이다. 

질그릇 같은 절, 마곡사

마곡사는 뒤로는 국사봉(392m), 서쪽으로는 옥녀봉(361m), 동쪽으로는 태화산(613m)에 포근하게 안겨 있다. 국사봉에서 발원한 마곡천은 절집을 관통해 만곡을 이루며 흐른다. 마곡사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청계수가 흐르는 이른바 '연화부수형'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마곡사 터를 두고 도선대사는 '천만년 오래도록 절이 들어앉아 있을 큰 터이자 삼재가 들지 못하는 곳', '유구와 마곡 두 냇가 사이는 천 사람의 목숨을 살릴 만한 곳'이라 했다. 조선 명종 시대의 천문학자 격암 남사고는 '유구마곡 양수지간은 만인의 생명을 살릴 만한 곳'이라며 기근이나 병란의 염려가 없는 십승지로 꼽았다. 

피부병 치료차 온양 온천 행차길에 마곡사에 들른 세조는 매봉 아래 작은 봉우리에 올라 '만세 동안 없어지지 않을 땅'이라고 감탄했다. 그는 영산전 현판을 직접 쓰고, 잡역의 부담을 면하게 하는 수패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마곡사는 9세기 신라의 보조 체징에 의해 창건된 이후 범일과 도선, 각순대사에 의해 수차례의 중창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51년 철종 2년에 작성된 <사적입안>은 마곡사가 640년 자장율사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가 없다. 오히려 남아 있는 자료에 근거했을 때 9세기 신라 보조 체징이 창건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특히 1782년 대화재로 대법당을 비롯한 전각이 모두 소실된 이후 1788년 제봉 체규에 의해 대광보전 개건 등 의미 있는 중창이 이루어졌고, 왕실의 태실로 봉해지는 등 마곡사의 사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마곡사의 독특한 공간구조

마곡사는 사찰을 관통하는 개울을 경계로 수행공간인 남원과 교화공간인 북원으로 나뉘는 독특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원에는 중심 전각인 영산전 외에 홍성루와 선방인 수선사, 요사인 매화당 그리고 명부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1650년경 중수), 세조가 남긴 현판이 남아 있다. 
  

마곡사는 화승의 맥을 이어온 중요한 화소사찰이다. 화소사찰이란 불화나 불상을 제작하고 단청을 시공하는 불모를 배출하는 사찰을 말한다.

마곡사는 북방화소(금강산 유점사), 경산화소(수락산 흥국사)와 더불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남방화소의 본거지로, 금호당 약효와 송광사 봉린과 갑사의 보응, 송광사의 일섭과 석정으로 이어지는 마곡사 화맥의 거점이다.

조선 말 마곡사에 상주한 스님이 300여 명에 달하고, 그중 80여 명이 화승이었다고 한다. 백련암 가는 길에는 국내 사찰 중 유일하게 근현대 불모 6명의 업적을 기린 '불모비림'이 조성돼 있다.

남방화소의 본거지답게 마곡사 불전들의 벽면에는 17~20세기에 그려진 불화와 인물화 및 산수화들이 가득하다. '불화갤러리'를 방불케 한다. 입장료 3000원에 이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대광보전, 대웅보전 등에 그려진 영산회상도, 삼장보살도(동국대 박물관 보관), 칠성불화, 수월백의관음보살도, 나한도, 신중화, 금강역사도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대광보전의 뒤쪽 벽면에 그려진 수월백의관음보살도는 압권이다. 대광보전과 영산전의 신중화는 마곡사 화맥의 계보를 잇는 금호당 약효의 작품이라니 놓칠 수 없다. 

법당의 냉기에 손발이 얼어붙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불화가 조성돼 있는 사찰은 구례 화엄사, 양산 통도사, 순천 선암사 등 손에 꼽는다. 

영산전 현판은 세조의 친필이며, 대광보전, 심검당, 심검당 옆의 마곡사 현판은 각각 당대 최고의 서필가인 표암 강세황, 송하 조윤형,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만공과 백범의 자취가 서린 곳
   일제강점기 마곡사와 만공스님과 백범 김구 선생의 인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만공은 마곡사 주지를 지냈고, 백범은 은거생활을 했다. 두 사람 모두 독립운동가다.

만공이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만공이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와 병합하려는 시도에 맞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호통을 치며 단호하게 반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31본산 주지 중에서 만공만이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 독립운동가로서의 만공의 삶을 재조명하고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백범 선생은 일본군 중좌 살해범으로 낙인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탈옥해 마곡사에서 은거생활을 하며 원종스님이란 법명으로 출가했다. 

응진전 옆에 그가 지냈던 백범당(백범기념관)과 해방 후 다시 찾아와 심었다는 향나무, 승려가 되기 위해 삭발식을 치르며 눈물을 흘렸다는 삭발바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마곡사, 삭발바위, 군왕대 및 백련암을 연결한 '백범 명상길'이 조성돼 있다. 

마곡사가 일제강점기에 만공, 백범과 같은 '위험인물'들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켰던 호국불교의 전통을 가진 화엄도량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곡사의 오랜 내력과 절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는 울림이 크다. 새삼 마곡사의 저력이 놀랍다.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범당에 걸린 서산대사의 선시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즐겨 사용하시던 휘호라고 한다. 새해, 마곡사가 세상에 전하는 '화두'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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