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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가보니’] 태화산 솔바람은 의인(義人)을 숨겨주고(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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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4-11 10:55 조회1,8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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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날씨가 롤러코스터를 탄다. 3월 15일 이후 3월말까지는 날씨가 따뜻해서 봄꽃이 일찍 꽃망울을 터뜨리는가 했다. 올해 벚꽃의 북상은 제주도(3월25일)에서 여의도(4월3일)까지 9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4월초부터 기온이 다소 낮아지면서 개화속도에도 제동이 걸렸다. 사실 이런 현상이 올해만 그런 게 아니다. 개화가 유난히 빨랐던 지난해에는 3월 하순 기온이 평년에 비해 크게 높아져 서울의 경우 벚꽃(3월 28일)이 진달래(23일), 개나리(25일)와 거의 같이 피었다. 

◇ 나목 사이로 움트는 봄과 녹음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 충청도 일대에서 봄에는 마곡사의 꽃과 신록, 가을에는 갑사의 단풍을 구경하라는 말이다. 봄기운을 느껴보고자 지난 6일 태화산 마곡사로 향했다. 벚꽃이 피기에는 조금 이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벚나무는 낮은 지대에만 한두 그루 꽃망울을 터뜨렸을 뿐 전반적으로 아직 겨울 분위기다. 하긴 여의도에서 본 벚꽃은 왕벚나무 꽃이고, 이곳에서 흔히 보는 산벚나무나 벚나무는 개화가 더 늦다. 주 후반에 제법 많은 비가 지나간 후 보슬비까지 이따금 흩뿌려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이건 꽃샘추위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고, 춥지도 않다. 그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 입구 주차장부터 1㎞남짓 걸어 들어가는 길도 매화와 산수유 꽃 몇 그루 외에는 나목이 풍경을 지배한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마곡천변의 날씬한 층층나무가 촉새 주둥이 같은 잎을 틔웠고, 서어나무가 하늘하늘 연두색 꽃을 매달았다. 나뭇가지를 감싸고도는 붉은 빛의 물 기운과 새 싹들에서 봄은 차고 넘친다. 하긴 이르고, 화사한 봄을 바라는 것도 사람의 욕심일 뿐이다. 올해처럼 지독한 가뭄에도 늦든, 이르든 어김없이 꽃과 잎을 밀어 올리는 나무와 풀이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 백범이 몸을 숨긴 은둔의 고찰  
마곡사는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으려고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혐의로 옥살이를 했던 청년 김구가 23세 때이던 1898년 가을 탈옥한 직후 숨어들어 이듬해 봄까지 지냈던 곳이다. 백범 선생이 이곳에 은둔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정감록은 난세에 총칼과 기근을 피할 수 있는 은둔처로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선정했는데 이곳 마곡사 일대도 포함됐다. 충남 공주군 유구읍(維鳩邑)과 마곡사(麻谷寺)의 두 물줄기가 산과 서로 휘돌아 가며 S자로 감기는 곳이다. 이곳 노인들은 6.25가 지나간 줄도 몰랐다고 한다. 나머지 십승지지로는 소백산 풍기 금계촌 동쪽 골짜기, 봉화군 춘양면 춘양마을, 덕유산 일대, 변산 개암사 인근 등이 있다.
마곡사는 김구 선생과의 인연을 기념해 사찰 앞마당 한쪽에 백범당을 조성했다. 이곳에는 백범의 친손자인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이 2009년 10월 기증한 백범의 휘호가 걸려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범이 즐겨 인용했던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다. 바로 옆에는 선생이 1946년 다시 마곡사를 찾아와 심었다는 향나무가 서 있다.

◇ 빼곡한 소나무 숲 사이 솔바람길 
마곡사의 절집 배치는 독특하다. 대광보전 바로 뒤에 대웅보전이 약간 더 높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앞을 호위무사처럼 지키는 두 그루의 노거수가 있다. 높이 25m 가량 되는 전나무와 20m 쯤인 백송이다. 마곡사가 터 잡은 태화산에는 소나무가 많다. 수령 100년 안팎의 소나무와 어린 소나무들이 높지 않은 산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다. 소나무과 적송의 비중이 이렇게 높은 산도 드물지 싶다. 여기에 새로 낸 걷는 길 이름도 마곡사 솔바람길이다. 백범명상길(1코스), 백범길(2코스), 송림숲길(3코스) 등 서로 일부 겹치는 세 길을 걸을 수 있다.
3개 길 가운데 1코스인 ‘백범명상길’을 따라 냇가로 접어드니 목조 데크가 나타난다. 물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한 옆에 조성된 공간에 백범이 출가할 때 삭발했다는 삭발터가 나타났다.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로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진언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선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건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백범일지) 계곡물 위에서 원앙 한 쌍이 서로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중대백로 한 마리가 먹잇감을 찾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 솔바람 소리와 마음의 소리 
셋째 코스인 ‘송림숲길’을 따라 태화산을 올랐다. 소나무가 우점종인 숲 속은 솔바람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금방 식는다. 비는 그쳤지만, 빗물에 젖은 솔잎들이 흔들리면서 습기 머금은 소리를 전달한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솔바람 소리를 ‘송운(松韻)’ ‘송성(松聲)’이라 칭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천연송림욕장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적당히 구부려 가면서 자란 젊은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른다. “신령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면 그 소리가 퉁소 소리를 뒤덮는다. 뿌리는 황천(黃泉)에 뻗어 내리고 가지는 푸른 하늘을 어루만진다. 이렇게 하면 대궐의 기둥을 세우고 큰 집의 들보로 쓸 수 있으니 온갖 나무 중에 으뜸이라 하겠다” 당나라 문인 부재(符載)의 ‘식송론(植松論)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나무를 백목지장(百木之長)이라 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실린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온갖 나무의 어른이어서 문을 지킨다”는 말에서 나왔다. 그래서 중국과 우리나라에선 예로부터 소나무 심는 일을 인재를 기르는 일에 곧잘 빗댄다.
활인봉까지 올라간 후 2코스로 경로를 변경해 백련암으로 내려온다. 백련암 바로 위의 숲길 오른 쪽은 소나무, 왼쪽에는 서어나무 군락이다. 온갖 새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백련암은 백범이 주로 머물던 곳인데 여기에서 마곡사 쪽을 내려다 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백범은 이곳에서 소나무 숲길을 산책하면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는데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살아도 되는가를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생골마을이다. 다락논과 밭들이 펼쳐져 있고, 장작을 때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산 속임에도 물이 풍부한 이곳은 예전부터 자급자족이 가능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 솔잎 융단 사이로 고개 내민 야생화  
빛이 잘 드는 곳에서 자라는 양수인 소나무가 우점하는 숲의 경우 대체로 종 다양성은 낮은 편이다. 진달래, 조록싸리, 청미래덩굴, 그늘사초, 송이버섯, 진박새, 쇠박새 등이 함께 살아간다. 특히 야생화는 종류가 많지 않다. 그렇지만 연분홍빛 진달래꽃이 탐방로를 점점이 수놓았다. 게다가 소나무잎은 2~3년에 한 번씩 지고, 다시 나기를 거듭하기 때문에 솔 숲길 바닥에는 늘 푹신한 갈색 솔잎 융단이 깔려 있다. 덕분에 경사가 급한 언덕에서도 무릎과 발이 편안하다. 
고도가 낮은 마곡사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현호색과 제비꽃이 많이 피었다. 하나 같이 낮은 키에 앙증맞은 꽃과 잎을 내밀었다. 이 무렵 야생화들은 봄 한철살이(한해살이) 식물이다. 이름과 달리 봄 한철살이 식물은 땅속에서 남몰래 장수를 누린다. 미국 시워니대 교수인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은 ‘숲에서 우주를 보다’라는 책(원제: The Forest Unseen)에서 이들의 생존 비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식물들은 지하저장고에서 자라나는데, (…) 꽃이 차가운 봄 공기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 수 있는 것은 지난해에 양분을 저장해둔 덕분이다. 봄 한철살이 식물은 잎을 틔운 뒤에야 광합성을 일으켜 에너지 수지를 맞춘다. 이 풀들은 ‘숲의 패스트푸드광(狂)’이라고 할만하다. 나무들에 잎이 자라서 빛을 가로막기 전에 식사를 끝마쳐야 하는 것이다.”

◇ 몸 안에 꽃을 피우기 위하여 
그래도 만발한 봄꽃이 아쉬워 다음날 서울에서 노란 개나리꽃 물감을 뒤집어쓴 서대문구 안산 자락길을 한 바퀴 돌았다. 성질 급한 산벚꽃 몇 그루가 꽃을 피웠다. 이번 주말이면 안산 허리춤에는 분홍빛 솜사탕 구름이 드리워질 것이다. 그렇지만 장자가 말했듯 봄을 즐기기 위해 꼭 먼 곳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집 마당에서도,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서도 꽃과 신록, 그리고 솟구치는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안산 자락길에서도 매화, 살구, 히어리 등의 꽃도 좋지만, 훌쩍 커버린 귀룽나무 잎과 산사나무 잎, 층층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등의 어린잎이 그에 못지않게 예쁘다.  
지난달 보름부터 말까지 기온이 높아 개화시기가 앞당겨 지나 했더니 이달 들어 다소 쌀쌀해졌다. 마곡사의 왕벚꽃과 산벚꽃도, 북한산의 귀룽나무 꽃도 개화가 늦어질 것 같다.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 그대 몸 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인도 시인, 카비르) 슬픈 것은, 숲 속에서 다른 온갖 생물들과 맞물려 피는 꽃들과 달리 지금 우리 사회의 날선 갈등에 휩싸인 사람들 안에서는 꽃이 필 조짐이 없다는 것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이 계절, 젊은 백범도 그렇게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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