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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있는 명소] 공주 태화산 마곡사-21살 김구 눈물흘리며 삭발…명당 속 천년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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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4-05 09:39 조회3,7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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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 2월 하순, 울분에 찬 21살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마주친 일본인 육군중위 츠치다 죠스케(土田讓亮)를 난도질, 잔인하게 죽였다. 그리고 그의 피를 움켜 마시고 시신은 강에 버렸다. 국모 민비 시해에 대한 ‘일본인 보복 살인’이었다.

도망은 커녕 “해주에 사는 김창수(김구의 옛이름)가 죽였노라” 방을 붙이고 집으로 돌아와 잡으러 오길 기다리다 석달만에 해주 옥에 갇혔다. 다시 두달 후 인천으로 이수돼 사형집행일을 받았다. 이제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김구, 이승에서의 마지막 초침이 ‘째깍째깍’거리던 순간 덕수궁에서 고종이 긴급 ‘사형집행정지’ 명령을 내린다.

천년고찰 공주 태화산 마곡사. 석탄일을 맞아 행사 준비에 바빴다.
운명의 여신은 김구 편에 섰다. 형장에 불려가기 직전 드라마 같은 두가지 운명의 여신이 그를 살렸다.

첫째는 고종의 사형 재가가 떨어진 직후 한 승지(承旨)가 기적 처럼 김구의 죄명이 단순 살인죄가 아닌 ‘국모보수(國母報讎ㆍ국모시해 앙갚음)’임을 발견하고 임금에게 다시 아뢰어 ‘사형집행 정지’ 결정이 내려진 것. 승지 눈에 이 네 글자가 안 띄었으면 그대로 이슬 처럼 사라질 찰나였다.

둘째,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으므로 파발을 띄워도 한발 늦었을 법, 때마침 사흘 전에 개통된 서울~인천 간 전화가 그를 살렸다. 덕수궁에서 긴급전화로 ‘사형집행 정지’를 타전해온 것.(백범일지)

그러나 사형만 면했지 풀려나진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대책없이 감옥생활 할 김구가 아니었다. 바닥 마루를 뚫고 드디어 영화와 같은 ‘쇼생크 탈출’에 성공한다. 몰래 숨어 삼남지방을 정처없이 돌다 충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에 몸을 맡겼다. 이곳은 숨어살기 좋은 곳으로 선조들이 지목했던 땅이기도 했다.

마곡사 대광보전의 모습. 뒷쪽 건물은 대웅보전이다.

마곡사에 온 김구는 스님의 권유로 승려가 될 결심을 하고 ‘눈물의 삭발식’을 갖는다. 사찰을 안고 흐르는 태화천 옆 바위에 앉아 머리를 잘랐다. 상투가 잘려 나갈 때 자신도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사제(師第)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에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고 술회했다.

김구 선생이 승려가 되기 위해 삭발했던 곳.

이때부터 김구는 원종으로 불렸다. 불교에 귀의해 반년을 이곳에서 중 생활하다 스님께 금강산으로 들어가겠다며 떠났다. 그러나 그가 간 곳은 평양이었고, 절을 뿌리치고 나와 전국을 돌다 중국으로 건너가 조국 광복운동을 한다.

그리고 해방을 맞아 48년만(1946년)에 다시 마곡사를 찾은 김구, 대광보전 기둥에 적힌 주련(柱聯)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 물러나와 세상 일을 돌아보니, 모두가 마치 꿈 속의 일과 같다)’라는 글을 보고 옛 생각에 접어든다. 그는 “그때 무심히 보았던 이 글귀가 오늘 자세히 보니 나를 두고 이른 말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뜰에 무궁화와 향나무를 기념식수하고 떠난다. 이때 김구는 주석에 이어 비상국민회 총리 신분이었다.

대광보전 전면 기둥 6개에 새겨진 주련. 두번째 마곡사를 찾은 김구 선생은 이 글을 읽고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천년고찰 마곡사와 백범 김구 선생과의 인연이다. 구한말,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스무살 청년의 애환을 지켜본 사찰이다.

마곡사는 이 보다 400년 앞서 또 한 사람이 숨어 들어왔다.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은신했다. 세조가 벼슬을 내리며 설득했지만 응하지 않자 한양에서 가마를 타고 직접 찾아온다. 김시습은 황급히 부여 무량사로 피신했다. 세조는 여기까지 와서도 헛걸음을 하게 되자 한탄해 하며 “신하 하나 못 얻는 내가 어찌 가마를 타고 돌아가랴” 하고는 타고 온 가마를 두고 떠났다. 그 가마는 마곡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마곡사는 백제 의자왕 3년(643년) 신라 승려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주변 산세가 겹겹이 에워싼 천혜의 은신처였다. 조선시대 정감록에서도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로 꼽았다. 마곡사를 감싼 산과 경내를 휘감아 도는 하천이 태극형을 이룬다.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으로 불려 기근이나 전란으로부터도 안전한 곳이다.


마곡(麻谷)은 신라시대 보철화상이 법문 때 삼나무(麻) 처럼 사람들이 빽빽하게 계곡에 모여들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주차장을 지나 일주문을 통과하면 길은 숲의 터널을 이룬다. 계곡도 함께 따라 절을 거슬러 올라간다. 3연휴의 첫날인데다 석탄일인 만큼 말 그대로 사람들이 ‘마곡’을 이루었다.

구비구비 돌아 걸어가니 해탈문이 나온다. 다른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문이다. 해탈문은 마곡사의 본격적인 정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세계로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된다고 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 왼쪽 담 너머에는 영산전(靈山殿), 매화당(梅花堂)이 있는데 약 120년 전 김구 선생이 처음 마곡사에 들어가면서 느낀 풍경을 잠깐 보자.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고개를 넘어서니 지옥에서 극락으로, 매화당을 지나 소리쳐 흐르는 내 위에 걸린 긴 나무다리를 건너 심검당(尋劍堂)에 들어갔다”고 표현하고 있다.

지금은 들어가는 풍경이 조금 다르다. 모두 필자 처럼 해탈문을 통하고 천왕문을 지나 돌로 만든 극락교를 건너 심검당 앞으로 들어가도록 돼 있다. 여행에서 이러한 차이점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다. 극락교를 건너는 순간 마치 또 하나의 신비한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②편에서 계속)
 
마곡사로 가는 길, 해탈문, 천왕문, 극락교(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
■ 대광보전 주련 : 대광보전 전면 6개의 기둥에 6개의 주련이 있다.

淨極光通達(정극광통달) : 청정함이 극에 이르면 광명이 걸림 없으니
寂照含虛空(적조함허공) : 온 허공을 머금고 고요히 비출 뿐이라
雖見諸根動(수견제근동) : 비록 육근(귀,눈,코,혀,몸,뜻)이 유혹을 만날지라도
要以一機抽(요이일기추) : 한 마음을 지킴으로써 단번에 뽑아버릴지어다
却來觀世間(각래관세간) : 물러나와 세상 일을 돌아보니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 모두가 마치 꿈 속의 일과 같네


■ 김구 선생이 츠치다를 죽일 때 곱씹었던 각오 :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스승의 가르침이었던 이 말을 츠치다 일본 중위를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다 이 말을 되새기며 최종 결심을 세웠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의 절벽에서 손을 놓을 수 있는 결단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김구 선생은 이름을 여러 번 바꾸었다. 아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으나 후에 창수(昌洙)로 바꾸고 25세때는 구(龜)로, 3차 투옥 시절이던 1913년(38세) 서대문 형무소에서 다시 구(九) 정한 뒤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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